2017년 12월 15일

고씨세계분파 현황

 

 

고씨파조 유사(高氏派祖 遺事)

(1) 星主公派의 派祖 仁旦 公

仁旦(일명 : 仁朝) 공은 시조 耽羅國 乙那王의 55세 孫이고, 중시조 탐라星主 末老 公의 10世 孫이다. 공은 고려 元宗과 忠烈王을 전후한 시기에 耽羅星主를 지내었으므로 星主公派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공이 성주로 있을 당시 제주도는 三別抄의 거점으로서, 그리고 蒙古(元)의 전초기지로 계속 이용되었었다. 삼별초는 원래 고려 武臣정권 때의 특수군대로, 1219년(高宗 6) 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崔瑀가 도적 방지 등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설치한 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 별초란 용사들로 구성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후 야별초에 소속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左別抄․右別抄로 나누었고, 또 몽고의 침입 때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前衛로서 다분히 私兵的인 요소도 있었으나 抗蒙戰鬪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고병을 괴롭혔고,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고와 講和가 성립되자 江華島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란군의 지휘자인 裵中孫은 왕족인 承化侯(溫)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은 후,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한편 연안 경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島內의 민심이 동요되었고, 문무관 중에서 강화도를 탈출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므로, 배중손은 1천여 척의 배에 公私 재물과 도내의 자녀들을 싣고 珍島로 들어가 그 곳을 對蒙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이 무렵 고려조정에서는 삼별초의 세력이 제주도에 미치는 것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우선 靈巖副使 金須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이끌고 들어가 방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장군 汝霖에게도 군사 70명을 주어 보내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1270년(원종 11) 9월 중순경에 제주도에 들어와 진지와 성곽을 구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여 삼별초의 入島를 대비하였다.

그러나 10월 말경에는 李文京이 이끄는 삼별초가 咸德浦로 상륙함으로써 방어군과 삼별초 사이의 공방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東濟院에 진을 친 삼별초가 元堂峯 松淡川에서 방어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김수, 고여림 등이 전사하고 방어군도 전멸되었으며, 승리한 이문경은 수륙교통의 요지인 朝天浦에 웅거하였다. 그리고 이 때 성주 仁旦 公께서는 王子 文昌祐와 함께 고려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패전의 사실을 알리고 원병을 요청했다.

그 후 1271년(원종 12) 5월 15일 진도가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金通精은 잔여세력을 이끌고 그들의 최후의 牙城으로 지켜오던 제주도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 이리하여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의 활동이 제주도에서 항파두리(虹坡頭城)를 쌓고 다시 전개되었다. 즉 본토의 해안․도서 지역에 침입하여 지방관리나 몽고인 병사를 살해, 납치하거나 공물 운반선과 전함을 약탈 혹은 소각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항전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작전을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대상이 연안 지방에 그쳤음은 그 세력이 진도에 있을 때에 비해 위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 1273년(원종 13) 4월에 고려․몽고 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군이 패전됨으로써 삼별초는 역사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약 100년간 제주도는 직접․간접으로 원나라의 관리하에 놓이게 된다. 즉 원나라 世祖는 일찍부터 탐라를 南宋과 일본의 요충지로 삼아 마음을 쏟아왔을 뿐만 아니라 삼별초 정벌 직후인 1273년 6월 제주도에 耽羅國(招討司)을 세우고 군사 1천7백명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1275년(충렬왕 1)에는 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로 고쳤다가 1284년(충렬왕 10)에는 다시 軍民安撫使로 고쳤으며, 그 때 세공품(貢賦)은 매년 毛施布(紵布) 1백 疋을 바치게 했다. 이러한 때에 성주 仁旦 公께서는 1276년(충렬왕 2) 4월 고려 조정에 입조한 바 있으며, 이 때 조정에서는 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의 摠管이 되어 총관부의 일들을 주관하도록 하기도 했다.
1294(충렬왕 20) 5월에는 일본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던 元나라의 世祖가 죽자 고려의 충렬왕은 재빨리 탐라의 반환을 요구하여 돌려받았는데, 11월, 성주 仁旦 公과 왕자 文昌祐公이 충렬왕을 뵙게 됨에 왕은 紅鞓 (붉은 색 가죽띠), 帽蓋(모자와 차일), 靴(가죽신) 하나씩을 하사하였다. 이것은 성주․왕자가 일찍부터 탐라를 반환해 줄 것을 원나라에 요청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것이 성공한 까닭에 이들 물품을 하사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도 牧馬의 일만은 여전히 몽고측에서 관장하였다. 仁旦 公에게는 順良․順元 두 아드님이 있었으며, 성주작은 順良公․順元公을 거쳐 世孫인 典書公派의 파조 臣傑 公에게로 이어졌다.

(2) 典書公派의 派祖 臣傑 公

臣傑(일명 : 實開) 공은 乙那王의 55세 손이고 中始祖 初代星主 末老公의 13세 손이다. 고려 27대 忠肅王 때 출생하였고, 恭愍王 때에 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또 禑王을 전후한 시기에는 탐라 성주를 역임하였다.
禑王을 전후한 시기는 대륙에서는 元․明 두나라가 교체되는 어수선한 시기였으며, 그 여파로 제주도에서는 馬匹 징발 문제로 牧胡의 난이 계속되었는가 하면, 倭寇도 간간이 침입하여 도민을 괴롭히던 시기였다.
목호는 원나라가 제주도 목장에 펴견하여 牧馬의 일을 담당케 했던 몽고인으로서 이들은 공민왕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세력이 강성하여 자주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더욱이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진 후, 명나라의 계속된 마필 요구는 더욱 이들을 자극하여 반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372년(공민왕 21) 3월 明나라가 제주에서 생산되는 마필을 징발하기 위해 秘書監 劉景元을 揀選御馬使로 삼아 파견했을 때, 고려에서는 禮部尙書 吳季南을 함께 제주도로 보내었다. 그러나 이 때 목호들은 명나라에 대한 반발로 제주에 상륙한 유경원과 牧使 겸 萬戶 李用藏 등을 살해하자 오계남은 몸을 피해 조정으로 귀환했다. 또 1274년(공민왕 23) 4월에도 明나라에서는 北元(몽고)을 정벌하기 위해 禮部主事 朴密과 玆牧大事 蔡斌을 고려에 보내어 탐라에서 기른 말 2천필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門下評里 韓邦彦을 제주도에 보내어 마필을 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호인 石迭里必思․肖古禿不花․觀音保 등은 우리가 어찌 감히 세조황제가 기른 말을 명나라에 바치리오하고 3백필 만을 보내었다. 이에 明使 채빈(蔡斌) 등은 말이 2천필이 차지 않으면 황제가 우리를 죽일 것이니, 차라리 여기서 왕에게 죄를 받겠다하고 협박하므로 낭패해진 공민왕은 마침내 탐라의 목호 정벌을 결정하고 門下贊成事 崔瑩을 영광․전라․경상도의 三道都統使로 삼아 목호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이 때 동원된 병력이 전함 314척, 병사 25,605명이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최영 장군은 정벌군을 이끌고 8월 28일 明月浦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사람을 보내어 목호들을 효유하였다. 그러나 목호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먼저 도착한 11척의 병사와 목사 李夏生을 살해하고 저항의 뜻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명월촌에서부터 시작된 싸움은 어름비(泳非)오름․밝은(明近)오름․검은(今勿)오름․새별(曉星)오름․延來․洪爐 등지로 옮기면서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석질리필사․초고독불화․관음보 등은 서귀진 앞바다 범섬(虎島)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정벌군이 섬을 포위하자 그들은 벼랑에서 떨어져 자결하고 패배 전멸되었다. 이렇게 하여 최영 장군의 목호 정벌은 승리하여 탐라를 평화롭게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제주를 떠난 직후인 1375년(禑王 1) 11월에는 제주 사람 車玄有 등이 관청을 불태우고 安撫使 林完․목사 朴允淸․馬畜使 金桂生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성주 臣傑 公께서는 이듬해 정월 왕자 文臣輔․鎭撫․林彦․千戶․德羽 등과 군사를 일으켜 반란자들을 진압하였다.

한편 이 해에 倭寇가 또 6백여 척의 船團을 이끌고 섬 주위를 돌면서 침범하므로 公께서는 이를 맞아 힘을 다하여 방어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전분투하여 마침내 왜구를 격퇴시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公의 전공을 가상히 여겨 戶部典書의 직함과 상을 후하게 내렸으며, 1385년(우왕 11)에는 紅鞓 .紫袍(자주색 도포)․弓矢(활과 화살)․表裏(옷의 겉감과 안감) 등을 하사하였다.
公은 鳳仁․鳳義․鳳禮․鳳智의 四子를 슬하에 두었는데, 그 중 봉례 公이 星主를 세습하였으며, 조선조 태종 때에는 벼슬이 摠制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주작은 1402년(태종 2)에 爵號가 僭濫하다고 조정에 요청하여 左都知管으로 개칭되었고, 총제직은 公의 長子 尙溫 公에게 세습되었다.
한편 4남 鳳智 公은 조선조 태종 때 上護軍에 이르렀으며, 獨子인 得宗公이 靈谷公派의 파조이다.

(3) 靈谷公派의 派祖 得宗 公

得宗 公(1388~1452)은 조선조 태종․세종․문종 때의 文臣으로 서세문 등 고씨족보를 최초로 기록한 고씨대표 인물로 시조 탐라국 고을나왕의 60세손이고, 중시조 탐라 성주 말로 공의 15세손이다. 字는 子傅, 號는 靈谷, 雅號는 圓山, 諡號는 文忠公이다. 1388년(고려, 우왕 14) 제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조선조 太宗조에 상호군을 지낸 아버지 鳳智 공을 모시고 漢城에서 출사하시다. 1414년(태종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호군, 예빈사판관,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여 1427년(세종9년)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예조 및 호조참의를 역임, 1447년(세종30년)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을 제수 받았다. 1438년, 1441년 2회 사신으로 명나라, 1439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다. 고향 제주에 기여한 공적이 다대한바 1447년 중추원사 때 관덕정 창건과 1437년 제주목관아 소실 때 복원토록 하여 홍화각 기문(記文)과 현판을 쓰셨다. 또한 제주 자제로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을 위하여 자제직록(子弟職祿)을 마련하였다.
1419년(세종 1) 濟州 敬差官으로 부임하여 토지측량과 농사장려, 1434년 예조참의로 제주흉년때 조정에 건의하여 구호양곡 1만석과 소금을 들여 보냈고 조정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 공은 문장과 시문, 서예 등 문장필법이 탁월한 명현(名賢)으로 안평대원군 몽유도원도 칠언시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1452년(문종2) 서울 남부 차계동에서 65세를 일기로 별세하니 조정에서 문충(文忠)공 시호(諡號)를 내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를 가자(加資), 황해도 금천군 고강음면 정동(개풍군,북면 13소리) 재궁동에 예장하게 하고 山 1局, 水1曲을 사패지로 하사하였으며 配는 정경부인 전주이씨로 묘는 公墓 下酉坐이고 4남1여로 4남 모두 문과에 급제(2남과 4남은 장원급제)하여 관찰사, 이조참판, 사간, 대사성 등 모두 문신으로 정 2품에 이르렀다. 공의 사후 1843년 이조 헌종 9년 제주목사 이원조가 명신(名臣)공의 배향을 위해 오현단에 「향현사」를 건립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871년(고종8년)철페된후 2007년 향현사를 복원, 2013년부터 매년 10월 15일 제향하고 있으며
그리고 전라북도 고탁면 강고리에는 공의 충효를 기리는 정려문 三孝閣이 건립 되고 경기도 江華郡 佛恩面 斗雲里 永慕祠에서 해마다 祭祀를 모시고 있고 濟州 安德面 東廣里 唐岳 先世墓域에 靈谷公 追慕壇에서 매년 5월5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4) 文忠公派의 派祖 慶 公

慶 公은 始祖 乙那王의 56世孫이고 中始祖 初代星主 末老公의 11世孫이다. 호는 休翁, 시호는 文忠公이다.
公은 1276년(忠烈王 2)에 출생하였으며, 다섯 살 때 이미 시와 문장을 지었고, 12세 때에는 論語를 외워 당시 玉山(沃溝지방)의 氏奇童으로 칭송받았다.
1291년(충렬왕 17) 16세의 나이로 科擧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集賢殿 太學士에 이르렀다. 1310년(충선왕 2)에는 益戴原勳에 올려져 玉城君에 봉함을 받았다. 이것은 대대로 살아온 고장인 沃溝지방의 고을 이름을 딴 것이다.
글이 빼어날 뿐 아니라 인격 또한 고매하여 당대의 선비들로부터 높이 추앙을 받았는데, 특히 고려 말의 三隱先生으로 꼽혔던 牧隱 李穡, 圃隱 鄭夢周, 冶隱 吉再 등이 공을 스승으로 존대하여 충효의 정성이 東方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公은 1342년(忠惠王 3) 향년 67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니 조정에서는 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여기서 公의 선대를 살펴보면, 高祖父 惇謙 公은 고려 明宗朝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兵部尙書에 올랐으나, 고종 때에 바른 말로 과감하게 諫言한 것이 임금의 귀에 거슬리고 당시 세도를 부리던 대신들의 시기함이 되어 결국 鄭仁傑 등의 모함을 받아 群山 앞바다의 梧竹島(옥주군 오식도)로 유배당하였다. 이것이 이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曾祖父인 瑩中 公은 1131년(仁宗 9)에 출생하였으며, 자는 汝晦, 시호는 靖安 公이다. 熙宗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普門閣 直學士가 되었다.
1200년(神宗 3)에는 禮賓卿으로 國子試를 주관하였고, 뒤에 國子監 司業․東官 侍講學士 등을 역임하고 致仕하였다. 이후 末年에는 進士시험을 주도하여 인재를 등용시키고, 正言 李奎報․開國侯․崔忠獻 등 당시의 名士들과 詩․賦로 서로 교류하였는가 하면, 이름난 문장가들과 耆老會를 조직하여 글로서 여생을 즐겨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을 詩仙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1202년(神宗 3)에 별세하였다.
公의 묘소는 원래 坡州(경기도 長端郡 長道面 上里 泰村洞)에 있었으나 1926년 도로 공사로 옮길 때 誌石이 발견되어 손자 代인 伯․仲․季 3형제의 계보가 확실해졌고 長興伯派의 上代祖의 내력도 입증되었다. 즉 문충공의 當祖父인 »y 公은 惇謙 公의 손자며, 瑩中 公의 다섯째 아들인데, 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리고 3형제 중 장남인 伯 公의 아들 慶 公이 文忠公派의 파조가 되었고, 차남인 仲 公은 長興伯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3남인 季 公의 아들인 仁庇 공은 花田君派의 파조가 된 것이다.

(5) 長興伯派의 派祖 仲木筵(중연) 公

仲木筵 公(일명 福林)은 始祖 乙那王의 55世孫이고, 中始祖 初代星主 末老公의 10世孫이다. 字는 壽一, 諡號는 良獻이고 長興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장흥백파를 이루게 되었다.
公은 19세 때에 登第하여 벼슬이 左拾遺에까지 이르렀는데 高麗史 列傳에 公에 대하여, 언행이 곧고 의리에 밝았다.고 하였으며, 萬姓譜”에는 고려 왕족인 懷仁君 王珪가 公의 풍채가 크고 또한 빼어나며 성품이 곧은 것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서 사위를 삼으니 開城君(夫人 王氏)이다.라고 기록하였다.
1361년(恭愍王 10) 10월 紅巾賊이 압록강을 건너 南侵하여 開京(개성)에 육박하였을 때, 공민왕은 福州(경북 안동)로 피난하였는데 이때 공은 끝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난은 이듬해에 평정되고 개경이 수복되어 還都하게 되자 공민왕은 공은 扈從功臣으로 삼고 長興伯에 봉하였다. 이후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諡號는 良獻이라 하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파조 仲 公의 손자인 臣傅 公은 일가를 거느리고 西海岸을 따라 남하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法聖浦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長城郡을 비롯한 潭陽郡(昌平), 光山郡(大村) 일대에 集姓村을 이루고, 여기서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간 장흥백파의 분포를 낳게 된 시초가 된다.
臣傅 公은 처음 이름이 協, 호는 森溪(낙향 지명)였다. 中始祖 末老 公의 13世孫이고 파조 중연 공의 曾孫이다. 고려 말에 兵部侍郞을 지내었으며, 고려 왕족인 益原大君의 사위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同年舊交였던 太宗이 公에게, 臣下 겸 스승(傅)으로 나를 도와 달라는 뜻으로 神傅라는 칭호를 내려주었고 또 戶曹參議의 벼슬도 내렸으나 公은 外家인 고려조의 의리를 끊을 수 없다하여 사양하였다.
이후 公은 지금의 장성군 삼계면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별세하였는데, 이 소식을 듣고 太宗은 신하를 보내어 삼계면 덕산리 귀바위(德山里 耳岩)에 禮葬케 하고 삼계면 森北洞 일대를 賜牌地로 정하게 하였다.

(6) 花田君派의 派祖 仁庇 公

仁庇 公은 始祖 乙那王의 56世孫이고, 中始祖 初代星主 末老公의 11世孫이다. 父親은 諫議大夫 兵部尙書를 역임한 白州君 季 公이고, 증조부는 東宮 侍講學士 禮賓卿을 역임한 瑩中 公이며, 고려 말에 文科에 급제하여 兵部侍郞․金吾衛․上將軍 등을 역임하였고, 그 공훈으로 花田君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花田君派를 이루게 되었다.
花田은 오늘날 강원도 橫城의 옛 이름이다. 이로써 화전군파로 分派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강원도에 많이 살고 있으며, 경상도 남해 지방과 전라북도 求禮 지방에 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과거에는 그 후손들이 본관을 橫城으로 일부에서 써오던 것을 1973년 氏世錄 발간을 계기로 하여 제주로 환원되었다. 강원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구려 高朱夢의 후손들이 본관을 횡성으로 통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혼동을 피하고 옛 근원을 찾아서 화전군파의 후손들은 본관을 제주로 전부 고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濟州氏의 上古譜書 및 耽羅國王世紀 원본 등도 강원도 화전군파에서 遺傳되어 왔다.

(7) 文禎公派의 派祖 澤 公

澤 公은 始祖 乙那王의 58世孫이고, 中始祖 初代星主 末老公의 13世孫이며 東宮侍講學士․禮賓卿 瑩中 公의 6世孫이다. 曾祖父는 直長을 지낸 良庇 公이며, 부친은 奉翊大夫 水平 公이다. 字는 仲德, 호는 栗亨, 諡號는 文禎公이다.
1289년(忠烈王 15)에 출생하였으며, 1316년(忠肅王 3)에 進士에 합격하고 1320년(충숙왕 7)에 秀才科에 합격하여 右副代言이 되고 銓選을 관장하였다.
그 후 忠穆王 때에 羅州牧使, 忠定王 때에 光陽監務를 역임했으며, 1352년(공민왕 1)에 密直提學이 되었다. 이어 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 大提學 겸 判春秋館事의 벼슬을 지내었으며, 1370년(공민왕 19)에 공은 향년 81세로 逝去하니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어 禮葬하게 하고 文禎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금산의 士林들이 뜻을 모아 錦山書院을 세워 공을 配享하였으며, 후손들은 전라북도 남원․龍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후손 중 薛 公은 일명 鳳生이라고도 하며 조선조 태조 때에 開國原從功臣으로 봉하여졌고 龍潭府院君의 작호를 받았다.

(8) 上黨君派의 派祖 恭益 公

恭益 公은 始祖 乙那王의 49世孫이고, 中始祖 初代星主 末老公의 4世孫이며 兵部侍郞을 西院君 大基 公의 아들이다. 일찌기 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檢校將少監에 이르렀으며, 上黨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公을 上黨君派의 派祖로 삼고 있다. 上黨은 오늘날 忠淸北道 淸州의 옛 이름이다. 후손들은 청주와 함경북도 北靑 지방에 집성촌을 이루어 많이 살고 있다. 충청북도 陰城郡 遠南面 馬松里 世居地에는 崇德祠를 건립하여 매년 4월 5일 선조의 祭享을 봉행하고 있다.
함경북도 북청 지방에는 宗派系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上黨君의 9世 종손인 陽山公 哲 公이 처음 北靑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는데, 고려말기의 文臣이었다.
중시조 末老 公의 12世孫이며 刑部典書 孝敏 公의 아들로 1368년(공민왕 17)에 출생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工曹 典書를 지냈으며, 史學을 깊이 공부하여 고금의 사실에 밝았다. 조선조 태조가 즉위한 후에 옛 情誼로 공조판서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북청으로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9) 良敬公派의 派祖 令臣 公

令臣(일명 : 仲臣) 公은 始祖 乙那王의 49世孫이고, 中始祖 初代星主 末老公의 4世孫이며 兵部尙書를 지낸 文盖 公의 아들이다. 諡號는 良敬公이며 고려 肅宗․睿宗 때의 文臣이다. 1045년(靖宗 11)에 출생하였으며, 1083년(文宗 37) 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1098(肅宗 3) 3월 右贊善大夫, 12월 吏部郞中, 1101년(肅宗 6) 6월에는 東北面 兵馬使를 거쳐 같은 해 12월에 御史中丞으로서 刑部侍郞 겸 右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1105년 11월에는 秘書監․直門下省事, 이듬해 3월에는 左散騎常侍로 경상도 安撫使가 되어 公田稅를 면제하여 백성들의 곤경한 생활을 구제하였다.
1108년(예종 3) 7월에는 尙書직에서 西北面 兵馬使로 임명되었고, 이후 禮部尙書․同知樞密院事 ․ 禮賓卿 ․ 吏部尙書 등을 거쳐 檢校司空 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公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이었으나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지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벼슬하였으며, 議論이 강개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굽힘이 없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왕이 마음을 가다듬어 나라를 다스려, 公卿들이 다투어 新法을 올릴 때에도 공은 말하기를 祖宗의 成憲이 갖추어 있으니 분분하게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를 지키고 실추시키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다.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자신을 지켜서 1115(睿宗 11) 2월 逝去한 후에는 장례를 치룰 수 없을만큼 가난하였다.
이에 朝廷에서는 3일간 政事를 멈추고 예관을 보내에 禮葬케 했으며, 良敬公이란 諡號를 내렸다. 이에 公을 良敬公派의 派祖로 삼고 있으며, 본관을 開城으로 쓰는 후손들도 있다. 경상북도 尙州와 聞慶지방에도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학자와 문신을 많이 배출하였다.

(註) 삼국유사(三國遺事), 영주지(瀛州誌), 고려사요절(高麗史要節),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한국사(韓國史), 동문선(東文選) 참고.